이다미와 박정현, 현재의 건축 비평을 말하다: '한국건축비평의 회복' REVIEW

유행도 한 달, 이 주면 빠르게 바뀌는 요즘. 5개월 전 한국 건축계 이벤트를 되돌아보는 글을 쓴다는 것은 몇 번의 철이 지난 행위일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여건 중 하나여서 살짝은 울며겨자먹기로 쓴 글이기도 했는데, 나름 마음에 들어 기록을 남겨본다. 글 전문은 아니고 제출한 글을 쓰기 위해 끄적인 메모장같은 기록이다.

1. 이다미의 비평

모른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박완서의 소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등 문학적 참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즉 해석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비평을 하나의 큰 서사로 구성하고자 한다.

앎과 모름에 대해 이 사이를 오가는 허구의 힘에 대해 말한다.

건축을 이런 저런 개념과 시점을 경유해 말해볼 수 있는지, 대화해볼 수 있는지, 가능하면 어떻게 더 다양한 샛길로 새어볼 수 있는지, 배제하기 보다는 초대하고, 정제되기보다는 불순해지며, 폭로하기보단 돌보며, 말하기에 가깝다.

특히 박완서의 '닮은 방들'을 소개하면서 소설의 내용이 아크로마키의 세 자매 주택의 평면과 겹쳐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냐는 내용이 흥미롭다.

2. 박정현의 비평

비평인지, 설명인지? 아크로마키와 아파랏체에 대한 작품 비평보다 한국건축비평계에 대한 비평. 특히 영상의 후반 10분 정도 남기고부터는 한국 건축계 비평을 한다.

주체, 레이어, 표층, 취사선택, 데이터베이스, .. 뭐 이런 함축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아직 내 깊이가 충분하지 못해서 잘 못알아들었다. 뭐 대충 한국 건축계를 1년 쯤 전 휩쓸고 간 참조에 대한 이야기도 한 것 같다. 비평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의심했고 자본과 이미지의 논리 속에서 비평은 힘이 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비평에 대한 내용은 충분히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3.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의 상황, 즉 안정성에 대한 약속이 부재하는 삶을 탐구하기 위해 버섯과 함께 떠나는 여행 이야기 자본주의 폐허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하는 내용.

오염은 순수성을 거부한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혼종성, 불완전성을 긍정한다.) 그리고 완결된 시스템이 통제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관계들, 체계 밖의 힘을 긍정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뒤섞이며 예기치 않은 가능성이 생겨나며, 시스템이 망가진 곳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의 방식이 출현한다. 버섯은 여기서 죽은 것과 산 것,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라는 존재이다.

4. '오염' 개념과 두 비평의 연결

이다미의 비평은 오염 개념을 실천한다. 체계 밖의 언어들을 긍정한다. 즉 건축 비평의 순수한 언어들을 고집하지 않는다. (형태, 구조, 동선 … 또 뭐가있을까) 그리고 문학, 철학 (박완서, 카프카), 개인적 경험들, 떠오르는 잔상들을 뒤섞는다. 건축가, 건축주, 행인, 그리고 건물 그 자체까지 서로 다른 주체의 시섬을 횡단한다. 전문가로서의 비평가라는 자신의 고정된 위치 자체도 해체한다.

모른다는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불완전성을 긍정한다. 여러 서사가 얽힌 채로 남겨둔다. (그래서 청자들은, 아니 나는 좀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칭이 말하는 버섯처럼 이다미는 건축을 하나의 확정된 의미로 고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의미들을 불러들인다.

세 자매의 집을 분석하면서 돌봄, 가족 서사와 위계를 끌어들이는 것. 건축이란 순수한 대상?을 사회적, 문학적, 정서적 요소로 '오염'시킨다. 이것은 건축을 망가뜨리는 것이라기보다 건축이 '실제로' 작동하는 복잡한 현실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 (올지아티의 비참조와 반대에 있다.)

박정현의 비평은 '오염'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자본과 이미지의 논리가 너무나 강력해서 비평의 언어가 개입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비평의 알리바이'란 마치 우리가 비평하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오염' (혼종적 단어, 새로운 관계.. )이 불가능한 조건을 문제삼고있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5.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논란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부터 시작된 사건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를 천경자의 대표작으로 전시하고 포스터로 제작·판매했는데, 천경자 본인이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특이한 점은 작가 본인이 위작이라고 주장했음에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가 진품이라고 감정했다는 것이다. 천경자는 1991년 자필 공증확인서까지 작성하며 '과천 현대미술관 소유의 <미인도>는 위작이고 가짜임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남겼다.

2015년 천경자 사망 이후 유족이 프랑스 뤼미에르 광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고, 뤼미에르는 다중 스펙트럼, 초고해상도 촬영 등을 통해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2016년 검찰은 과학감정과 전문가 안목감정을 거쳐 진품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논란의 핵심은 그림이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보다도 그 진위를 가려낼 권위와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다. 천경자 본인의 감각과 기억을 믿을 것인가, 전문가의 안목을 믿을 것인가, 과학적 분석을 믿을 것인가, 제도적 판단을 믿을 것인가… 허구와 진실은 명확하지 않고, 논쟁은 지금까지도 봉합되지 않았다.

6. 이다미와 박정현을 미인도 논란에 (내맘대로) 빗대기

이다미의 비평은 '미인도는 진짜다'라고 말하는 쪽, 진품파의 논리 구조와 닮아있다. 그 그림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필치, 그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증거를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다미는 그 건축이 만들어낸 경험,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감각과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현은 위작파의 논리 구조와 닮아있는 듯 하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진짜라고 말할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를 묻는다. 천경자 본인도, 프랑스 감정팀도, 검찰도, 국립현대미술관도 각자의 권위를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 권위 자체가 불투명하다. 영상에서 이것이 비평인가, 설명인가를 묻듯이 박정현은 미인도 논란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진품이라고 판단할 권위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을 것이다.

만약 작품이 정말로 위작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작 소장'이라는 불명예를 감당할 수 없고, 미술 시장은 천경자 작품 가격에 영향받고, 검찰은 미술계 권력 구도 속에서 판단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최종 권위를 가지는가?

7. 허구를 감당하는 방식

기사에서 현명석이 이다미의 '압승'을 언급한 대목은 흥미롭다. 그것은 이다미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서라기보다 지금의 건축계가 그동안 외면해 온 허구의 언어를 과감히 끌어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완서를, 버지니아 울프를, 카프카를 건축 비평에 끌어들이는 것. 그리고 모른다는 상태를 기꺼이 인정하는 것. 이런 태도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박정현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다. 그의 비평은 허구를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너무 쉽게 허구를 소비해왔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본과 이미지의 논리 속에서 비평이 무력하다는 진단은 비평가로써도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이 보여준 것은 '비평의 회복'이라기보다, 비평이 감당해야 할 허구의 무게인 것이다. 허구를 만들어내는 용기와, 그 허구가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 이 둘 사이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건축 비평은 미인도의 진위를 끝내 확정하지 못한 채 논쟁을 지속하는 상태와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비평의 형식일지도 모른다.